본문 바로가기

배설하지 못하면 인간은 죽어

검은 양은 아직 숨이 붙어있습니다.


검은 양은 아직 숨이 붙어있습니다.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양이 나에게 다가와 자신도 담배 한 대 피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보송한 검은 양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양이 자신과 함께 살자고 하면 최소한의 필수품만 챙겨 그 풍만한 털 속으로 재빠르게 안길 셈이었다.

검은 양은 상당히 이성적인 편에 속했다.
차원이 다른 감성을 지닌 양이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에 초원은 꽤 험악했고
이성이란 게 그에게는 아주 그럴듯한 방편이었다.

양은 늑대는 물론이거니와 치타, 사자 그리고 작은 벌레도 조심해야 했지만
무엇보다 코요테를 끊임없이 경계해야만 했다. 그것들은 상상 이상으로
똑똑하고 지혜로웠으니. 그들 앞에선 조금 더 두껍고 잘 짜인 이성을 써야 했다.
고난의 연속. 그러나 주변의 양들은 그것이 고난인 줄 자각하지 못하였으니 다행이었으려나.
그런데 검은 양이 등장한 것이다. (등장이라는 단어는 너무 드라마틱하다_ 그리고 나는 드라마가 싫다)
어쨌거나 그 시점, 검은 양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온몸으로 느끼고 관조하는 검은 양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어.
검은 양과 첫 눈 맞춤을 하였을 때 나는 그가 가진 암흑의 원형을 마주했다.
환한 암흑의 원형.
양은 그것을 제 안 깊숙이 품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 지었다.
나를 향해서. 늑대를 향해서. 성질 드러운 양치기를 향해서.
그리고 코요테 무리들을 향하여
씨익.



검은 양이 양치기에게 맞았는지 털이 깎였는지 늑대에게 물려 다리를 절고 있는지
코요테 무리들에게 그 미소를 빌미로 집단구타를 당하고 있는지는 당최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간간히 그 검은 양의 소식은 들려온다. 아직 숨이 붙어있다고.
나는 그 검은 양에게 여전히 품어지고 싶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검은 양을 힘껏 품어주고 싶다.
시간이 우리의 편이 아니니 서둘러야겠지만 그리되지 않더라도
나는.
너와 담배 한 대 마주하여 핀 것으로 만족하겠다.

'배설하지 못하면 인간은 죽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쁜 피  (0) 2020.01.19
recompose } { resonance  (0) 2020.01.19
공 사운드  (0) 2020.01.19
파란 점  (0) 2020.01.19
타지마할이 뒤집혔고, 노란색 구렁이는 또다시 여자를 찾아냈습니다.  (0) 2020.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