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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하지 못하면 인간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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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인 땅콩 껍질 까기 땅콩 껍질을 벗겨내고 벗겨내어도 땅콩이 나오질 않아요 이번에 얻은 땅콩 껍질은 지금까지 세 번 벗겨보았는데 한 번 더 벗겨 봐야겠지요. 제가 두려워 하는 것은 땅콩 껍질을 한 번 더 까 보았는데 땅콩이 나오지 않는 것. 그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에요. 땅콩 껍질 속에 물컹한 초록색의 완두콩이 들어있을까 봐 두려운 것이지요. 두렵다는 감정이 제가 느끼는 이것을 제대로 표현해주는 단어인지 모르겠네요. 껍질 까기를 좀 미뤄도 될지요. 판단이 잘 서지를 않아요. 결국엔 제 선택이겠지만요. 조언이랄 것까진 없고, 혹시나 혹시나 하고 찾아온 거예요. 혹 방도랄 게 있을지. 여쭤보러 왔어요. 땅콩 껍질 까기를 '효율적'으로 미루는 법이 있을까 해서요. 저는 사실 그 껍질은 지금 벗기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저는 ..
쉿, 여전히 대부분은 그것을 몰라. 12:55-1:12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다.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강물로 떨어진다. 차갑지도 미지근하지도 물 같지도 않은 그 강물로 말이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감정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이제는 귀를 마비시키고 있다. 마비된 귀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노이즈마저도 들을 수가 없다. 그건 네 탓도 내 탓도 그 소리의 탓도 아니다 그래도 계속 웅웅 잠깐 이게 진짜 웅웅 소리가 맞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시점, 망각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물 같지도 않은 이상한 차원의 강물로 온 몸이 빠져들고 있다는 것. 떨어지고 있지만 추락하는 느낌은 없다. 대신 어딘가로 흡수된다. '흡수' 가 추락의 자리를 메운다. 웅웅 선율이 흐르고 선율이 이끌고 선율이 조정하고 무섭지. 두려워해야 하는 ..
고공 고공 그 사이에 빛 한줄기 슉 고공 긴장감 그 사이로 빛 슉 낮아지는 기압 불안감, 그 속에서 끝없이 맴도는 빛 한줄기 슉 물리적인 크기를 가진 것은 보이지도 않는데 여러방향에서 압박하는 힘과 대항한다. 지탱하고 지지하고 대응하고 대항하고 그러나 대면은 없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 무기력한 싸움 또 다시 빛 한줄기 슉 그것들은 입자가 되어 퍼지거나 그것들은 뭉쳐 덩어리가 되거나 어쨌거나 당도. 비행이 끝나거든 결국에는 당도.
고개 숙인 해바라기 향을 맡아보았니 슬며시 잡아 터뜨리고 꽉 잡아 터뜨리고 나는 너를, 당신을 끝도 없이 괴롭힌다. 네가 언제 나를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기름 물 섞일 수도, 섞이지도 않을 둘이 섞여 네 안을 그득히 채웠다. 물이 우위를 점하였나 물은 원을 만들어 그 속에 기름을 가두었다 나는 네가 다시 보이기를 희망하고 기대하고 기다렸다 이번엔 꾹 눌러 터뜨린다. 네가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숨긴다 너는 이미 발각되었다 혹한 추위가 분명한 그곳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네가 웅크려 있었다 노란 얼굴을 쳐들고 노란 바닥에 웅크려 노란빛을 쬐고 있더라. 그런 네 앞에 해바라기를 놓아두었다 그것이 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까 존중 연민 안심 죄책감이었을까 해바라기는 잎과 뿌리가 절단된 채로 그 머리만을 또다시 쳐들고 있었다 그 머리..
더 정확히 세분화해서 말해볼까 눈꺼풀이 내려오는데. 사실 눈꺼풀의 온도는 올라갔어 더 정확히 세분화해서 말해볼까. 동공을 기준으로 양 옆의 눈알은 감각이 사라지고 있지만 물컹하지는 않아. 아직까진 나를 보호할 정도로 강인하지. 동공 부분에는 조금씩 눈물이 고이는 느낌이 들어 하지만 그것들이 새는 일은 없을 거야. 조금 차다가 또다시 마르겠지. 이건 예측이 아닌 확신.
a386408 a386408 은 이윽고 몸의 구분이,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실제 그럴지도 몰라서 그는 자신을 들여다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가슴은 배꼽을 향해 점점 처져가고 배는 그 처짐과 비례하여 점차 부풀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둘은 하나가 될 것이다. 배에 젖꼭지가 달리게 되리라. 목과 어깨도 사정이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목'이라는 부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감각과 생각은 점차 그 범위를 확장시켜 그를 압박했다. 이제 그의 몸은 몸뚱이에서 과도하게 삐져나온 팔과 다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위가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그것이 실제인지 망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이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너무나 귀중했다. 이내 모든..
1분, 17번과 23번의 하품 뿌옇고 흐리멍덩해진 오른쪽 눈으로 바라본 지점 형광등 불빛이 가득한 방 안에서 블라인드가 오르락내리락거린다. 저 집 어른이 장난을 치는 것일까. 놀이를 하는 것일까. 오른쪽 눈이 이보다 더 명료하게 저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면 만족스러웠을까.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도 상황은 변화가 없지. 악화되거나 나아질 기미없이 몇 초전, 몇 분 전, 며칠 전과 같은 상태. 딱히 시간이랄지 기간이랄지 그런 것들이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닦아도 닦일 생각을 않는 오른쪽 눈알 덕택에 하품을 1분에 17번. 아직은 버틸만하다는 생각. 찡긋거리는 오른쪽 눈을. 이 눈알을 데리고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할까? 단숨에 파내버리면 조금 시원하지 않을까. 그것이 찰나일지라도 파내는 그 순간만큼은 조금 시원치 않을까. 푹 파인 홀에 찬..